: 까드득. 하고 기분 나쁜 소리가 귀를 아프게 찌릅니다. 창 밖의 마른 나뭇가지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창문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마치 죽음이 당장이라도 방 안으로 들어오려고 손톱을 세워 창문을 긁는 것 같아, 도저히 창문을 열고 싶은 기분이 들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꼭 저 기분 나쁜 나무 때문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아마 창문을 열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병에 걸려 빠르게 죽어가고 있고, 차가운 겨울 바람은 당신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깎아먹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지능 판정
: 당신이 걸린 병은 ‘백화병’이라고 하는, 온 몸이 새하얗게 변하면 죽는 병입니다. 전염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당신도 누군가에게 병을 옮았거나, 옮길지도 모릅니다.
병실 안은 적막합니다. 1인실을 혼자 쓰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의 온기라고는 죽어가고 있는 당신뿐인 이 병실에서, 아마 당신은 홀로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예상하고 있는 미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쓸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텅 비어 있는 병실 안에는 [탁자] 하나, [창문] 하나, 그리고 당신이 누워 있는 [침대] 하나가 전부입니다.
Zero:(이렇게 되어버린 자신을 조소할 마음도, 세상을 원망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이상하리만치, 아니...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덤덤한 얼굴로 누워 있는 침대를 관찰한다. 땅을 딛고 있는 것보다 이제 이 침대에 의지하는 게 더 익숙하다.)
: 어제 간 시트는 아직 깨끗합니다.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마치 누군가 흰 가루를 잔뜩 묻혀놓은 것처럼 원래의 피부색이 얼룩처럼 남은, 새하얗게 변한 당신의 팔이 보입니다. 눈을 돌린다 해서 부정할 수 없는, 백화병이 상당히 진행된 증거입니다.
Zero:(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탁자를 바라본다. 잠시 눈을 붙이려고 잠든 이후로 무언가 달라진 점이 있나?)
: 탁자 위에는 며칠 전 날짜의 신문이 놓여 있습니다.
관찰 판정
: 신문사마다 앞다투어 백화병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공포를 조장하고 싶은 것인지, 얼토당토 않은 말을 써내린 기사도 몇 개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환자가 완치되었다는 기사는 어디에도 없군요.
Zero:... (무감각한 얼굴로 신문을 보다가, 이번에는 창밖을 바라본다.) ...눈이라도 내리면 장관이겠군. (안 내려도 상관은 없지만.)
: 창문을 열 힘도 없이 그저 바깥을 쳐다보면,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을 두드리는 앙상한 가지가 보입니다.
<자연> 판정
: 겨울의 나뭇가지는 앙상합니다. 쓸쓸하게 흔들리는 가지네요.
Zero:(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읽은 적 있다. 나뭇가지에 달린 나뭇잎으로 자신의 앞날을 예견하던 환자가 나온 책이었던가...)
: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면, 치료소 정문이 보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는 않습니다. 그도 그렇겠지요. 이 치료소에는 당신과 같은 병을 가진 환자들이 다수 입원하고 있습니다.
이 병이 전염성이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옮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이 치료소에 가까이 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이 없겠죠. 그렇게 한산한 바깥을 보고 있다 보면, 익숙한 사람이 치료소 정문을 통과하는 것이 보입니다.
: 그녀와는 이 병에 걸려, 이곳에 입원한 이후로는 얼굴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치료소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아니면 혹시…?
방 안을 얼추 둘러보고 나면, 노크 소리가 들립니다. 이내 치유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오는 것은 자벨입니다.
오랜만에 본 자벨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수척해져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Zero:...자벨? 네가 어째서 여기에... (드물게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러다 다시 차분해진다. 특유의 침착한 목소리로.)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Zabel:내가 내 계약자를 찾아오겠다는데 문제라도 있나? (아무렇지 않다는 말투로 대답한다. 방 안을 한번 눈으로 훑더니 다시 제로에게 시선이 고정된다.)
: 자벨은 별 일 없는 듯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넵니다. 이곳에 들어오는데 이렇게 무방비하다니. 자벨은 백화병이 전염병이라는 걸 믿지 않는 걸까요?
치유사가 나가면 자벨은 당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새하얗게 변한 손을 부드럽게 쓸어내립니다.
Zero:이곳은 면회하려고 올 곳이 못 된다. ...안 된다는 규정은 딱히 없지만, 잘 알 텐데. '전염성'이 심하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평소라면 곤혹스러울 때마다 모자를 손으로 눌렀겠지만... 이 상황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습관처럼 손을 들었다가 내린다.)
Zabel:전염성이 있다고 확실하게 판명난 건 아니잖아? 그리고 난 건강하니까 전염성이 있다고 해도 괜찮을거야.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는 모습을 보더니 슬쩍 웃는다.) ... 그냥, 얼굴 한 번 보려고 왔어. 몸은 좀 어때?
Zero:하지만... (확실히, 판명된 건 없다. 전부 떠도는 소문일 뿐. 입을 꾹 다문다.) ...보면 알지 않나? 아직 견딜 만은 하다.
Zabel:(새하얗게 변한 손을 쓸어내리고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 크게 아프지는 않고? 주는 음식은 먹을만하고?
Zero:(자신의 손을 쓸어내리는 자벨의 손을 눈으로 쫓다가 고개를 든다.) 말했을 텐데. 아직 견딜 만하다고. 그리고 필요한 에테르에 대한 수급은 충분하다. ...메리드의 주막의 것에 비하면 질이 훌륭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에테르 공급에 모자람은 없다.
Zabel:이런 곳의 음식이 거기서 거기지. 네가 주문하던 특제 카레는 메리드의 주막의 명물이 되었어. 먹고 기절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도전하는 사람이 또 생긴다나 뭐라나... (말을 마치고는 다시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견딜 만하다면 됐어. 그건 유일하게 다행인 소식이네.
Zero:그런가. ... (그런 식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건가. 이곳의 인간들에게. 참으로 특이한 형태로...) ...고맙다.
Zabel:(고맙다는 말을 듣고는 눈을 깜빡거렸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일은 한 게 없는데... 굳이 따지자면 새벽에게 해야지. 다들 현학 논문을 뒤지며 치료법을 찾고 있거든.
Zero:그럼 그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야겠군. 물론, 그 행위는 나만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겠지만. 너에 대해선... (자벨을 바라본다.) 이곳 역시 따지고 보면 전쟁터 아닌가. 적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그런 걸 생각하면 사지로 무작정 뛰어드는 건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다름없군. (덤덤...)
Zabel:나도 앞뒤 상황 가려가면서 뛰어들거든. 나는 손해는 죽어도 안 본다고. ...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거야.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다름이 없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Zero:(허, 하고 혀를 차려다 그만둔다. 그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할 뿐이다.)
: 자벨은 잠깐 입원한 사람의 병문안을 온 평범한 사람처럼 말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곳에 입원한 이후의 일상을 가볍게 사담을 나누듯이 이야기합니다. 새벽의 근황이라던가, 자주 가던 ‘메리드의 주점’ 이야기 따위를요.
하지만 그런 대화를 하면서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이 병은 지금껏 나은 환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요.
당신은 이 병에 걸린 다른 환자들이 그렇듯이, 이곳에서 온 몸이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그저 누워 있을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온 몸이 새하얗게 변하면, 숨을 거둘 것입니다.
하지만 자벨은 왠지, 마치 그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마치 당신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다 자벨은, 갑자기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당신에게 제안합니다.
Zabel:... 제로. 나와 함께 설산으로 가지 않을래?
Zero:......설산? ...그 말은, 여길 빠져나가자는 건가?
Zabel:응. 여기 말고. 눈으로 뒤덮인 설산말이야.
Zero:갈레말드 같은 곳... 을 뜻하는 거군. 내가 맞게 이해한 거겠지?
Zero:(자벨 일행과 함께 보이드를 나왔던 때를 생각한다. 그땐... 솔직히 정신을 잃어 강제로 나오게 된 거였지만.) ...원래의 나였다면, 솔직히 거절하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Zabel:(거두었던 손을 내밀어 다시 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따뜻한 손은 아니었지만, 제 손이 더욱 따스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름대로 이 병에 대해 조사해봤어.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홀로 버려진 듯 색이 모조리 사라져 이 세상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해.
자신이 볼 수 있는 몸이 모두 새하얗게 된 순간에 견디지 못해 자해를 하다, 흘러내리는 피조차 새하얀 것을 보고 미쳐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고... (네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잇다 뚝 멈추었다.)
Zero:... (이질적인 존재. 색이 사라진.)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Zabel:내가 무슨 표정인데? (입가가 살짝 떨리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체하며 대꾸했다.)
Zero:병에 걸린 게 내가 아니라 너 같군.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Zabel:농담도. 걸리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아, 너랑 같은 병실에서 나란히 누워있을 수 있으려나? 먼저 걸린 선배의 조언이나 들으면서 말이야. (말도 안되는 농담을 하며 능청스럽게 굴었다.)
Zero:그것도 나쁘지 않군. ...그래서, 설산에 가려는 이유는?
Zabel:들어봐. 라피스 마날리스에 가봐서 알겠지만 설산은 모든 곳이 하얗잖아? 하늘도 눈구름으로 뿌옇고, 땅도 눈으로 뒤덮여서 하얗고. 어쩌면 말이야... 그런 곳에서는 색이 천천히 빠져나가서 오래 살 수 있지 않을까?
Zero:......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그럴 듯한 이야기군. ...물론, '그럴 듯한'이지만.
Zabel:그래도 이렇게 딱딱한 병실보다는 그곳이 낫지 않아? 적어도 고작 몸뚱이 하나 들어가는 침대 위에서 죽는 것보다는 흰 눈에 안기는 게 좋잖아. (다소 비관적인 대답이었지만 답지 않게 목소리가 밝았다.)
Zero:흰 눈에 안기고 싶다는 소망 같은 건 없다만. ......하지만...... (어쩐지 이렇게 죽음을 기다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너도 짐작하겠지만, 지금의 내겐 이곳을 전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힘은 있다고 보장하지 못한다. 계획은 있겠지?
Zabel:어머, 탈출이라도 하려고?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보고는 씩 입꼬리를 올린다.) 그런 방법보다 쉬운 방법이 있지. 그냥 내가 나가서 너를 퇴원시키겠다고 할게. 어차피 아무도 신경 안 쓸걸.
Zero:...... (눈을 끔뻑거린다. 그런 방법은 상상도 못했다...)
Zabel:이쪽 세계에서는 '규칙'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반요 씨. (눈을 끔뻑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워 남몰래 살짝 웃었다.) 환자는 가만히 있어. 내가 금방 다녀올게.
Zero:아니, 그. (말문이 막힌다. 이게 그렇게 쉽게 된다니. 그럼 신문이란 것에 적힌 건 다 뭐란 말인가. 이렇게 주먹구구식 방법이 통용되는 게 이 세계의 법칙이란 말인가?)
Zabel:(말을 하려다 멈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다시 발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몇 분 안 걸릴거야. 얌전히 있어.
: 잠시 뒤, 자벨은 곧 퇴원 허가서를 가지고 당신의 병실을 다시 찾아옵니다. 그리고 퇴원을 위해 짐을 싸는 것을 돕습니다. 짐 싸는 것을 돕는다고는 하지만, 당신에게는 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마무리를 한 자벨은 당신에게 두꺼운 옷과 목도리, 모자까지 꼼꼼하게 입혀줍니다. 밖은 이미 한겨울이고, 당신이 견디기에는 칼바람이 많이 분다는 걱정 어린 말투로요. 물론 자벨도 목도리와 모자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습니다.
Zabel:(목도리와 모자를 칭칭 두른 채 열심히 목도리와 모자를 둘러준다.) 이러면 괜찮겠지? 추위를 못 느낀다 해도 몸은 안 그렇거든요.
Zero:...... (모자를 꾹 눌러쓴다.) 어이가 없을 정도군.
Zabel:불편해도 참아. 다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야.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다시 한 번 꼼꼼히 목도리를 정리해준다.)
Zero:(그걸 이야기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 이상 토를 달진 않는다.)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되나?
Zabel:응. 슬슬 나가자. (먼저 문을 열고 나선다.)
: 병실 밖을 나서는 것은 오래간만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사방에서 꽂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온 몸을 감싼 두꺼운 옷들 때문인지, 돌아다니는 환자들은 당신이 백화병 환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네요.
듣기 판정
“백화병에 걸렸는데, 퇴원시켜도 괜찮은 거야?” “병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 다른 지역으로 간대.” “헛된 희망이지. 지금껏 그 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사람은 없었어.” “심지어 그 병에 걸리면 근처 식물들까지 다 죽는다잖아. 불길하기도 하지.” “벽지 색깔까지 하얗게 되는 걸 막기 위해서 새하얀 병실에만 가둔다잖아. 불길하기 짝이 없지.” “어쨌든, 여기에서 죽지 않는다면 고마운 일이잖아.”
조잘조잘. 미신과도 같은 말을 나눕니다.
Zero:...... (희망은 절망보다 전염성이 강하다. 그 어느 세계에서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니...)
Zabel:(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영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듣지 마. 쓸데없이 떠들어대기는... (상스러운 말의 첫 음절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막고는 슬쩍 눈치를 살핀다.)
Zabel:일단은 바깥으로 나가서 안내할게. (조금 더 빨라진 걸음이었다.)
Zero:... (물끄러미 뒷모습을 보다가) 저들의 말이 신경 쓰이나?
Zabel:그딴 거 신경 안 써. (단호하게 말을 끊어내었다.) 저것보다 심한 말을 하는 인간들도 많이 봤거든.
Zero:...그렇다면 다행이군. 나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들으라는 듯 말한다.)
: 밖을 나서면, 어쩐지 공기부터가 다른 것 같습니다. 답답한 병실에 갇혀 있어서 그런지, 병실 안의 공기는 무겁고 끈적한, 숨이 막히는 불쾌한 공기가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말이지요.
Zero:...... (정수리까지 차가운 공기가 머리 위를 스친다. 이런 감각, 오래간만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Zabel:설산에 가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 지금은 기차를 타고 가는 게 제일 빠르다고 해. 이곳에서 일단 역까지 가고, 열차를 타고 가는 거야. 어때? (바깥이 오랜만인지 가만히 서있는 제로에게 물었다.)
Zero:...기차와 열차. 그것도 본 적이 있는 기구로군. 상관 없다. 신체 상태를 고려하면 그게 가장 효율적인 이동 방법이겠지. 따르겠다.
그나저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괜찮나?
Zabel:뭔데? (고개를 돌리며 물어보았다.)
Zero:...네가 좀 전에 말한 방법. 그러니까 '온통 하얀 설산과도 같은 곳이라면 몸의 색이 늦게 빠질 거라고' 했던 것 말이다. ...네가 생각한 방법인가? 아니면 야슈톨라나 니다나가 생각해낸 방법인가?
Zabel:(예상치 못한 질문에 말이 멈추었다.) ... 그건 왜?
Zero: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그 두 사람이 전투 바깥에서 그럴 듯한 계책을 많이 생각해내서. ...그뿐이다.
Zabel:(생각보다 싱거운 이유에 얼굴이 풀어졌다.) 그냥 내 개인적인 의견이야. 개인적인 경험도 있고. 혹시나, 해서...
Zero:이해했다. (그나저나 개인적인 경험... 그 말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너도 이 방법을 시도해본 모양이지? 누군가에게.
Zabel:응? 아아, 병에 관련된 건 아니야. 그냥 내가 전에 설산에서 조금 지냈었거든. 그때가 떠올라서...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는 어투였다.)
Zero:...그렇군. 알겠다. 어찌 되었든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아예 없진 않으니.
Zabel:그럼 가볼까? 역에 도착해서 열차를 타면 쉴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듣기 판정
: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각자의 목적대로 소리치는 소리 때문에, 귀가 아픕니다. 원래 사람들이 많은 곳은 이렇게 시끄러운 법이지만, 유난히 사람들이 많아서 더 시끄러운 듯합니다.
Zero:...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다.)
Zabel:(얼굴을 찌푸리는 제로의 곁에 딱 붙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람이 생각보다 많네.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Zero:이곳은 원래 이렇게 번잡한 곳인가? (자벨을 보며 묻는다)
Zabel:나도 잘 몰라. (솔직한 대답이었다.) 애초에 갈레말드 밖에 기차도 없고... 하지만 최근에 복구되면서 사람이 갑자기 몰린 거 아닐까?
Zero:(하기야, 사베네어에서 기차는 본 적이 없다. 비공정인가... 하늘을 떠다니는 기구 말고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대로라면 바로 타기 힘들어 보이는데.
Zabel:일단 내가 표를 사올게. 그쪽은 사람이 더 많을테니 위험해. 네가 병에 걸렸다는 걸 알면, 그 병이 전염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험한 짓을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절대로. 절대로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돼. 알겠어? (다짐하듯 몇 번을 강조한다.)
Zero:알겠다. 그러도록 하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최대한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간다.)
: 그렇게 걱정 섞인 주의를 거듭 주고 나서야 자벨은 표를 사기 위해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갑니다. 군중 속에 홀로 남은 당신은, 어쩐지 사람들 속에 혼자 남게 된 것에 대한 고독함이 몰려옵니다.
아까 자벨의 말을 먹고, 겁이라도 먹게 된 걸까요? 하지만 고독감이라니. 당신은 쭉 병실에 혼자 있었고, 자벨은 표를 사러 잠시 자리를 뜬 것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말이죠.
어쩌면, 자벨이 말하던, 색이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이질감을 느끼는 그 공포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벨이 표를 사 오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터입니다. 그 동안 조금 주위를 둘러봐도 괜찮겠지요.
주변을 둘러보면, 신문을 나눠주는 [소년]과 멀리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 이상한 로브를 뒤집어 쓴 [무리], 그리고 바닥에 무언가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천]이 있습니다.
Zero:(이상한 로브를 뒤집어 쓴 무리에게로 자연스레 시선을 옮긴다. 같은 복장이나 모습을 한 집단... 보이드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그런 부류였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 역 앞이 소란스러운 것은 저 무리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끄러운 곳으로 가까이 가 보면, 로브를 뒤집어 쓴 몇 명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무언가 종이를 나눠주는 것 같네요.
받아 보면 「백화병은 신이 세상에 강림하셨다는 증거」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그림이 커다랗게 한 장 붙어 있습니다.
관찰 판정
: 아름다운 은하수가 그려진 밤하늘입니다. 하지만 화가의 실력이 좋지 않은지 서툰 흔적이 보입니다. 이런 그림을 가지고 무슨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참 어이없는 집단입니다.
Zero:(질릴 정도로 뻔하고 시시한 존재들이다. 돌아서서 신문을 나누어주는 소년 근처로 간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을 정도로.)
: 소년에게 가까이 가면, 신문을 살 수 있습니다. 신문에는 최근의 이야기들과 백화병에 대한 이야기들이 잔뜩 실려 있습니다.
자료조사 판정
: 병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 때문인지, 병에 대한 갖가지 논평들이 어지럽게 실려 있습니다. 병이 곧 세계 곳곳으로 전염되어 대규모의 희생이 나올 거라는 예측. 백화병은 신이 내린 신벌이라는 종교계의 논평. 신인류의 등장이라는 의견까지. 어느 것을 믿으면 좋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Zero:(신... 보이드에선 잊은 지 오래된 존재다. 하지만... 분명히 있다.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수상하게 보였던 천 근처로 가본다.)
: 천을 살짝 들쳐 보면,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새하얀 발이 보입니다. 천을 들쳐본 순간, 저것이 실제 사람의 발이라는 것을 의심할 정도로. 그것은 창백함을 넘어선 새하얀 빛을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다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실입니다. 실제 사람의 다리라고는 하지만 핏기 하나 없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시체의 발이기는 하지만요.
관찰 판정
: 그 기이하도록 흰 피부를 보고 있자면, 소름이 돋습니다. 이것이 바로 백화병에 걸린 사람이 맞이하는 말로겠지요. 아마, 당신의 미래…. (SAN 1/1D8)
: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립니다. 고개를 돌려 보면, 당신이 채 꼼꼼히 덮어두지 못한 천자락 사이로 드러난 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얀 발로 향합니다.
“백화병이야! 백화병 환자다!”
“다들 도망가! 백화병이 옮는다!”
역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됩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 부모의 손을 놓쳐 길 한복판에서 펑펑 우는 아이, 시체를 보고 기도를 시작하는 로브를 쓴 무리들.
차마 몰랐습니다. 백화병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가 이 정도라고는요. 심지어 천이 벗겨져 반쯤 드러난 시체에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돌로 맞은 부분에서는 피가 흐릅니다. 마치 우유처럼 새하얀 피가, 말이지요.
: ...당신의 몸에도 저런 새하얀 피가 흐르고 있을까요? 더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섬뜩한 모습에 문득 두려워집니다. (SAN 0/1)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것? 그런 건 많이 보지 않았는가? 당장 자신조차도...)
: 그 순간 문득, 강한 힘으로 끌어안겨집니다.
고개를 내려다 보면, 자벨의 얼굴이 보입니다. 상기된 뺨, 거친 숨소리. 그리고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눈빛…
혹시,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는 백화병 환자가 당신인 줄 알고 급하게 온 걸까요?
Zabel:(급하게 달려왔는지 흰 입김이 뿜어져나왔다. 시끄러운 주위를 둘러보곤 다시 제로를 올려다보았다.) ...
경계 당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에 있는 시체다. 아마도... 백화병에 걸린 자의 시체겠지.
아니... 시체인지는 확언하지 못하겠군.
Zabel:(제로가 말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 자벨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리고 돌팔매질 당하고 있는 백화병 환자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립니다.
그리고 어쩐지...당신을 안고 있는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 환자에게 당신의 미래를 투영해서 보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많이 불안한 걸까요.
Zero:......자벨. (가만히 이름을 부른다.)
Zabel:(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다시 들어 제로의 눈을 바라본다.) ... 난 이래서 가끔 사람들이 싫어져.
Zero:(물끄러미 마주 본다.) 너도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과 이익을 지키기 위한 길로 나아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너희는... 그렇지 않았지만.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계획에는 차질이 없고. ... (위로하는 데는 영 소질이 없어서, 잠시 고민한다.) 우선 심호흡해라.
Zabel:백화병 말고도, 소위 불결하다 여겨지는 병은 그 외에도 많아. 그리고 난 그 사람들이 어떻게 내쫓겨 죽어가는지 잘 보며 컸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가 제로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맞아. 계획에 차질은 없어. 그리고 심호흡을 할 정도로 난 약하지 않아.
지금 이 틈을 타서 어서 열차를 타자.
Zero:......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 그녀를 따라 열차를 타기 위해서 역으로 향하는 도중, 문득 뒤를 돌아보면, 천 아래의 시체는 온데 간데 없고, 흰 가루만이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시체를 가져간 걸까요? 아니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으로 향하도록 합시다.
어차피 저것이 백화병 환자의 말로라면...당신에게도 곧 찾아오겠지요. 그 전에 떠나도록 합시다. 온 세상이 새하얀 곳으로. 당신이 새하얗게 변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그 순백의 세상으로.
Zero:(온통 검은 세상에서 온 자신이 정반대의 세상으로 간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극단의 미래.)
규칙적으로 들려 오는 열차 소리에 어쩐지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집니다. 열차에 들어올 때까지, 한시도 긴장을 놓칠 수 없어서, 반대로 긴장이 풀어진 걸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가 당신이 백화병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당신도 그 시체와 똑같은 꼴을 당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분명 그녀도, 똑같은 생각을 했겠죠.
자벨은 다행이라고 말하며, 창문을 조금 엽니다. 찬 바람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열차 안의 답답한 공기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자벨의 말대로 다행스럽게도, 열차에 탈 때까지 별 일은 없었습니다. 덕분에 자벨도 열차를 타고 난 이후로는 눈에 띄게 안심한 것 같습니다. 창 밖은 겨울이라서 그런지, 앙상마른 겨울 나무들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 외에는, 그저 눈으로 덮인 하얀 산들 뿐입니다.
Zabel:(바깥을 내다보며 찬 바람을 맞았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어. 조금 쉬어.
Zero:(찬 바람을 맞으니 이상하게 몸이 노곤해진다. 사양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고단했다.) ...잠시 실례하도록 하지. (눈을 붙인다.)
Zabel:(가만히 눈을 붙이는 모습을 바라보다 살짝 미소짓는다. 눈을 감은 얼굴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깃들어있었다.)
(창밖에는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의 모습만이 보였고, 기차 안도 고요해 덜컹거리는 열차 소리만이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그저 잠시 네가 쉴 수 있는 시간이 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Zero:(잠든 채로 내쉬는 숨소리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아주 얕게, 앓는 소리를 내뱉다가 눈을 뜬다.) ...여긴...
Zabel:(작게 흘러나오는 앓는 소리에 움찔한다. 천천히 눈을 뜨는 모습에 혹시나 잠을 깨운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어. 혹시 몸이 안 좋아?
Zero:(잠결인지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잠기운을 털어내듯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흔든다.) 아니. ...아냐. 괜찮다. ...피곤한 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눈을 붙이지 않아도 괜찮겠나?
Zabel:나는 원래 잠이 없어서. (잠기운에 취해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살짝 웃음을 보인다.) 별일이네... 하긴, 갑자기 만나서 멀리 여행까지 가는 중이니까 피곤할만도 하지.
Zero:(몸이 허해진 까닭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측한 바를 내뱉지는 않는다. 확실한 것도 아니고, 약한 척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다. 갈 길이 멀다고 했으니. ... (창밖을 바라본다.) 여기도 하얗긴 마찬가지군.
Zabel:응, 여기는 항상 얼어붙어있는 곳이니까. (따라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겨울이니 추위가 더 매섭지. (네 옆모습을 응시하다 슬쩍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급하게 여기까지 오느라 얘기도 못했네.
Zero:어떻게, 라. ...글쎄. 네가 보기엔 어떻지? 어땠을 것 같나? (드물게 자벨의 생각을 먼저 물어보았다.)
Zabel:(역으로 질문이 들어오자 말문이 막혔다.) ...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 너라면 긴 고요가 익숙할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익숙한 것이라 싫었을 수도 있고. (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것을 느끼고 있는지 자신을 잘 모르고 있었다.)
Zero:(작게 웃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예상한 바와 크게 다르진 않아. ...그래. 네 생각대로 그 긴 고요를 겪어왔으니까. 다만, 보이드에서의 나와 이곳에서의 나는 다르니까. ...거기에 있을 땐 딱히 의식하진 않았는데, 지금 너와 있으니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군.
Zabel:(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그녀의 웃음을 알아차렸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솟아올랐다.) 내 감이 나쁘지는 않았나보네. ... 지금의 너는 어떻게 다른데?
Zero:......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연다.) 내게 주어진 빛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벨을 본다.)
어둠 속에 너무 오래 있었던 자는 빛을 보아도 그게 빛인지, 아니면 어둠을 너무 오래 본 나머지 환영을 보고 있다고 스스로 의심하게 되기 마련이거든.
Zabel:내가 보기에 너는 본디 빛을 아는 사람이야. 그저 오랜 시간동안 어둠에 잠겨있었기에 까먹었을 뿐... 사람은 환경에 따라 영향을 받기 쉽거든. 아무리 굳건한 사람이라도 오랜 시간동안 같은 환경 속에서 산다면 변해버릴 수 밖에 없지..
Zero:......너도 그런 적이 있나, 자벨?
Zero:그래. 타인을 의심하고, 타인보다는 자신을 더 의심하게 된 때가.
Zabel:잘 모르겠네. 항상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아서.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말을 잇는다.) 실은 나도 헷갈리거든. 내가 원래 타인을 믿는 사람인지, 의심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Zero:...그렇군. (다시 모자를 쓰며) ...네가 해준 말은 잊지 않겠다.
Zabel: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머릿속에 지난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별 말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기억 못 하는 걸 보면 중요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굳이 기억 안 해도 될걸.
Zero:아니. 제법 기억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도와준 것도 있으니, 기억해두도록 하지. ...아예 잊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Zabel:(네 말을 속으로 곱씹는다. 잊혀버리는 것들, 이라.) 그래. 잊지 마. 너라면 괜찮아. 이왕 약속했으니 끝까지 잊으면 안 된다?
Zero:그래.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않도록 하겠다. 나는 한 약속은 지키는 녀석이니 그것 하나는 보장하마.
Zabel:... 나는 신뢰 관계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마음에 들거든. 계약자가 이리 든든하니 마음이 편하네.
: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문득 옆 좌석의 가족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입니다. 아이가 옆 칸의 간이 식당에서 무언가 사달라고 조르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Zabel:(옆 자리의 사람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너도 뭐 좀 먹을래?
Zero:...음? ...먹을 것? ...아. 그러고 보니 음식 섭취를 한 지 좀 되었군. 이런 곳에서도 먹을 수 있는 건가?
Zabel:그런 모양이네. 옆 칸이 식당칸이라고 하니 일단 가서 괜찮은 게 있는지 살펴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에게 손을 뻗었다.)
Zero:(멀뚱히 보다가) 손을 잡으란 뜻인가?
Zabel:(아무 생각 없이 내민 손이었지만 그런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의식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일어나라고. (도로 손을 거두었다.)
Zero:(그 말에 천천히 일어선다.) 신기하군. 이동수단 안에서도 식사를 할 수 있다니.
Zabel: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은 많단 말이지. (먼저 옆 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 옆 칸으로 넘어가면, 그곳은 간단한 음식을 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식당 칸입니다. 대부분이 간단한 음식이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아보입니다. 진열대에는 싼 군것질거리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고, 그 옆에는 [신문]을 팔고 있는 트레이가 보입니다.
생각보다 신문사의 종류가 다양합니다. 하지만 어느 신문사나 앞다투어 백화병에 대한 최신 기사를 헤드라인에 올려두고 있습니다. 백화병에 대한 가십 기사부터 시작해서, 실제로 죽은 환자 가족의 인터뷰, 아직 진전이 없는 치료약과 백신에 대한 예측이 대부분입니다.
자료조사 판정
: 그 많은 기사들 중에,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있습니다. 백화병 환자가 오래 머물거나, 그 시체가 안치된 곳의 근처에서는 눈에 띄게 식물들이 죽어나가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기사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기사이지만...어쩐지, 신경 쓰입니다. 당신이 있던 곳도...그랬던가요?
당신과 환자들이 머물던 곳의 나무의 가지가 단지 겨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기묘할 정도로 말라 비틀어졌던 것이나, 역 앞의 시체가 놓여 있던 곳의 근처에는 마치 누군가가 정돈해 놓은 것처럼 주변에만 풀이 자라지 않았던 것이 떠오릅니다.
Zero:(신문기사에 신경이 곤두선다.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Zabel:(신문 가판대를 노려보며 서있는 당신의 시선 끝을 바라본다. 천천히 글자들을 읽어내리자 쓰잘데기 없는 기사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입을 꾹 다물었다 모르는 척 제로를 잡아끌었다.) 뭐 먹을래? 간단한 건 많네. 샌드위치나, 음료도 있고.
Zero:(홀린 듯 기사에 시선을 고정하다 얼른 고개를 돌린다.) ...어? ...아. ...아무거나 상관없다. 골라주는 쪽으로 먹도록 하지.
Zabel:매운 건 없어보이는데... (가판대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나마 자극적인 맛을 내는 것은 약간의 향신료가 들어간 고기가 끼워진 샌드위치였다.) 이게 제일 나으려나...? (점원에게 돈을 지불하고는 샌드위치 하나와 마실 것 하나를 사온다.)
Zero:...네 것은 사지 않아도 상관 없는 건가?
Zabel:입맛이 없어서. 그리고 말이지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거린다.) 열차 안이라고 일반적인 가격의 3배로 파는 건 양심이 없지 않아?
Zero:...... (그런가? 의식하지 않았던 터라 별 반응하지 않는다.)
Zabel:아무튼 자리로 돌아가자. 난 정말 안 먹어도 괜찮아. (샌드위치가 든 봉투를 꼭 붙잡고는 발을 옮긴다.)
Zero:(자벨의 뒤를 따라 조심스레 걸어간다. 최대한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 않으려 한다.)
Zabel:(자리에 도착하자 제로에게 먼저 앉으라는 눈짓을 한다.)
Zero:(도로 제 자리에 앉는다.) 고맙다. 덕분에 다시 체력을 회복할 수 있겠어.
Zabel:(당신이 자리에 앉자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부스럭거리며 봉투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건넸다.) 자, 빨리 먹어.
Zero:(샌드위치를 보는가 싶더니 한 입 입에 넣는다. 차갑다는 느낌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한다.)
Zabel:(천천히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제 눈동자에 모든 것을 새겨넣었다.)
: 그녀는 당신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봅니다.
그녀는 한참 쳐다보다 당신이 밥을 먹는 동안 잠시 책을 읽겠다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합니다.
Zero:(샌드위치를 계속해서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든다. 입에 있는 것을 삼키고 나서야 묻는다.) ...무엇에 관한 책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Zabel:그냥, 요새 글 연습한다고 읽는 거야. (책에서 잠시 눈을 떼고 답했다. 물론 금세 그 시선은 책으로 돌아갔다.)
: 당신이 음식을 먹는 동안 잠시 시간이 지나면, 자벨은 책을 읽다 깜빡 잠에 빠져들었는지, 어깨가 규칙적으로 위아래로 움직입니다. 그야, 많이 피곤할 수밖에 없겠지요.
당신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자벨은 치료소에서 만난 이후로, 계속 긴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도, 당신이 백화병이라는 것을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초조해 하고 있던 것이겠지요.
그런 잠든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당신은 어떤 감정이 드나요? 미안함? 고마움?
Zero:...... (그걸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차의 덜컹거림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기차 안에서 위태롭지도, 그렇다고 완전하게 안전하지도 않은 상태에 놓인 자신의 현재와도 같았다.) ... (불확실한 전진. 끝으로 가면 알 수 있게 되나?)
: 자벨은 온통 새하얀 세상으로 간다면 백화병을 늦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글쎄요. 과연 그것은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가요?
제로, 당신은 그 이야기를 얼마나 믿고 있나요? 눈앞이 온통 새하얀 설산으로 간다면, 당신의 목숨이 늘어날 지도 모른다고, 정말로 믿고 있나요?
Zero:(잘 모르겠다. ...애초에 목숨이 늘어난다 해도 크게 기쁘진 않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살려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지 않은가. 눈앞에 말이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한 가지 변치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제로, 당신의 죽을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의 기로인 것이지요.
: 자벨은 대체, 어떤 심정으로 당신에게 설산으로 가자고 제안한 걸까요. 당신의 죽을 장소로 함께 발을 들이는 심정이란. 대체 어떤 마음과 각오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걸까요.
그런 생각이 들어 자벨의 잠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 문득 목도리 위로 언듯 스치듯이 보인 자벨의 머리카락이. 새하얗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 머리가 멍해집니다.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만큼이나 진행되었다는 건, 제법 예전부터 병에 걸려 있었다는 뜻일까요…?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벨이 깨지 않게, 머리카락을 살짝 만져 보면, 마치 황혼을 맞이한 노인처럼 새하얗게 샌 머리에서 원래 빛깔의 머리카락이 군데 군데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자벨도 이 병을 가지고 있다면, 무슨 생각으로 설원에 가자고 한 걸까요?
그것은 당신을 위한…? 아니면…자신을 위한?
Zero:...... (어느 쪽이든, 자벨은... '함께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렇지만 숨길 이유가 있었나? 대체 왜?)
: 자벨이 손에 쥐고 있던, 펼쳐진 책의 한 부분이 보입니다. 자벨이 친 것 같아 보이는 밑줄이 그어진 문장이 눈에 띕니다.
「흰색은 모든 색이 불타올라 사라지고 난 뒤에 남는 마지막의 색이며, 모든 색을 덧칠할 수 있는 시작의 색이다.」
: 그 뒤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덜컹. 덜컹.
열차 소리가 울립니다. 죽을 자리를 찾으러 가는 사람을 위한 자장가처럼요.
...아니 어쩌면. 지옥의 문을 열기 위한 사자(死者)의 북소리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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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설산으로 향합니다. 당신의, 자벨의,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할, 새하얀 세상으로.
: 설산 앞의 역에 도착하면, 어느덧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손을 뻗어 보면, 하얀 눈이 손바닥 위로 내려앉아 순식간에 녹습니다.
Zabel:(손을 내밀어 녹아내리는 눈송이로 제 손을 적셨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정신을 차렸다)
Zero:(말없이 자벨을 바라본다. 보통 이럴 땐, 다들 그리들 말하더라) ...잠은 잘 잤나?
Zabel:응. 잠깐 졸았더니 말똥말똥하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말투도, 표정도.)
Zero:피차 몸이 이런 상태니, 조심할 필요성이 있겠군.
...너도, 나도 말이다.
Zabel:(설산 방향으로 나있는 오솔길로 발을 옮겼다.) 나말고 너를 걱정해야지. 가만히 있는 내 걱정은 왜 한담.
Zero:(물끄러미 보기만 한다. 모른 척할 모양이군. 싶어서 더는 말하지 않고 뒤따라간다.)
: 산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오솔길을 오르면, [간이 판매대]를 접고 있는 [장사꾼]이 보입니다.
Zero:(장사꾼을 무의식적으로 본다. 무얼 팔고 있었는지 알 수 있나?)
: 슬쩍 말을 걸면,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립니다.
“아무래도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아서 말이야, 곧 큰 눈이 쏟아질 것 같으니 지금 산을 올라가는 것은 위험해.”
장사를 접고 있는 것도 지금 더 이상 등산객이 올라갈 것 같지않아서라고 덧붙이며, 괜히 올라가서 산사태에 파묻히지 말고 얼른 돌아가라며, 장사판을 접고는 어딘가로 가 버립니다.
Zero:...라고 하는데, 이제 어쩔 셈이지?
Zabel:그래?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뭐, 상관없나, 라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서둘러야겠네.... 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일단은 올라가보자.
Zero:(정말 그곳으로 가면 뭔가 해결되리라고 진지하게 믿는 건가? 발걸음을 보챈다.)
: 하늘을 올려다보면, 확실히 큰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잿빛 하늘이 보입니다. 하지만 자벨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웃으며 손을 내밉니다.
그 손이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산에 올라가자고요.
그래요. 큰 눈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우리는, 애초에 이 눈이 시리도록 흰 세상에 묻히러 가는 것이었잖아요?
서로의 손을 잡고 산을 올라가다 보면, 설탕가루처럼 머리 위로 흩날리던 눈발이 조금씩 굵어집니다.
입에서 나온 하얀 입김과, 눈 앞에 흩날리는 새하얀 눈. 그리고, 당신을 이끄는, 당신의 손가락과 얽힌 자벨의 새하얀 손가락.
: 근처에 눈에 묻혀 있는 나무며 풀들이 모두 강풍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묘한 모양으로 자라 있고, 그마저도 모두 말라 죽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산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발은 눈 속에 파묻혀가고, 호흡은 점차 가팔라옵니다.
마치 온 세상을 눈으로 덮어버릴 것처럼, 쏟아지는 눈은 점점 굵어지고, 옷 위로도 눈송이가 내려앉아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새하얗게 변합니다.
적막한 산에 하얀 소음을 입히는 것은 오직 두 사람의 발소리. 그리고 아주 자그맣게 눈송이가 설산 위로 내려앉는 소리 뿐입니다.
힘겹게 산을 올라가는 길목에서, 그 고요함이 너무 차가웠던지 자벨은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합니다.
Zabel:아까, 설산에 관해서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고 했었잖아.
Zabel:너를 만나기 얼마 전이었지. 나는 설원을 떠돌았어. 목적도 없이, 그냥 눈밭에 파묻혀서 가만히 있었어.
너도 가봐서 알겠지만, 내 고향은 사막이잖아? 모래가 가득한 곳이지.
Zero:기억한다. ...아주 잘, 기억하고 있어.
Zabel:난 그게 싫었어. (입가에서 하얀 한숨이 흘러나왔다.) 모래는 털어도 털어도 끈질기게 붙어있단 말이야. 그게 지독한 인생처럼 느껴지더라.
그래서 설원에 갔어. 눈은 녹아서 사라지면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잖아.
그냥 나도 녹아서 사라지고 싶었어.
Zabel:되었으면 너를 못 만났겠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참을 그렇게 얼어가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
자리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잡았다고.
여기는 봄이 오지 않는 곳이니 눈이 녹을리가 없잖아?
Zero:(이곳에선 계절이란 것이 순환한다. ...자신이 있던 세계에도 그런 것이 존재하던 때가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Zabel:그래서 도로 일어났어. 애초에 난... 살고 싶었던 거야. 살아가도 된다고 허락 받고 싶었던 거야. (눈밭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개의치 않고 나아갔다.) 그러면서 다짐했지, 난 다시 살아갈거라고.
그리고, 널 만난거야.
Zero:(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나아갈수록, 도리어 나아가는 것은 더욱 힘들어진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되돌아온 걸까.)
Zabel:널 만나서 다행이야. 정말로. (어쩐지 내뱉는 말에는 그 어느때보다 희망이 깃들어있었다.) 어쩌면 설원에는 힘이 있는 게 아닐까?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 말이야.
Zero:나는 잘 모르겠지만, 네게 있어서 이곳이 그런 장소라면... 이곳이 어쩌면 네게는 구원의 장소겠군.
Zabel:응. 이곳과는 다른 곳에 있던 설원이지만 말이야. 커르다스, 라는 곳인데. 새벽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잘 알려줄거야. 꼭 가봐. 아름다운 곳이거든.
.....
네가 입원한 이후 많은 것을 찾아봤어.
나는 이런 쪽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연구자들이 요구하는 자료를 모으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녀오기도 했고, 나름대로 인맥을 모아서 치료법도 찾아봤어.
Zero:날 위해서인가? 아니면 날 포함한 다른 이들을 위해서인가?
Zabel:나는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못되어서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네 생각을 하면서 바삐 살았던 것 같아.
Zero:...... (입을 다문다. 뭐라 말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 그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눈보라가 치는 설원 속에서, 문득, 자벨이 발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당신을 돌아봅니다.
Zabel:정말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세상이야. 그렇지?
: 자벨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면. 그래요. 하늘도, 산도, 공기조차도 새하얀 세상입니다. 색이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우리가 입고 있는 옷밖에 없습니다.
그마저도 눈송이가 달라붙어 색을 먹어치워버린 것처럼, 하얗게 변했지만요. 더군다나 색색깔의 옷 속에 있는 당신의 몸은 색이 없을 테고, 어쩌면. 자벨도…
그 순간, 자벨이 목도리와 모자를 벗습니다. 두 사람을 눈송이와 함께 날려버릴 것처럼 세차게 부는 바람에 목도리와 모자가 날아가고, 그 아래에는 설원에 쌓인 눈에서 실을 뽑아내어 엮은 것 같은 새하얀 머리칼과, 공기조차도 얼릴 것 같은 하얀 피부를 가진.
오직 눈동자만이 원래 그대로의 색으로 남아 있는 자벨의 모습이. 눈보라 너머로 보입니다.
당신과 비슷한, 아니, 어쩌면 당신보다도 병의 진행속도가 빠른 것 같은 모습에, 아연질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열차에서 봤을 때는 저 정도로, 마치 정교한 눈사람처럼 보이는 이질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본 거. ...아니, 그보다 심각하군.
Zabel:알고 있었구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네가 보고 있는 대로 나도 너와 똑같이 죽어가고 있거든.
Zero:(일전에 라자한에서 화가가 그리던 그림을 얼핏 보았던 걸 떠올린다. 라자한 특유의 화려한 색채가 덧입혀지기 전, 스케치만 채워져 있던 캔버스. ...아마 누가 본다면, 자신들은 그러한 모습이리라.) 안 지는 얼마 안 됐다. 네가 그 상태가 되었다면 진행 속도가 빨랐거나 아니면 내가 이러한 상태가 되기 이전부터 그랬다는 거겠지. 내 말이 맞나?
Zabel:음... 전자의 편인거지. 진행 속도가 빠른 건 나도 알고 있어. 애초에 진행 속도가 빠를 수 밖에 없지.
일부러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으니까.
Zabel:나는 운이 더럽게 나쁜 동시에, 운이 더럽게 좋은 여자야. 이번에도 그건 빗나가지 않았고.
있잖아. 좋은 소식이 있어.
네 백화병, 해결할 수 있어.
Zero:(우뚝 멈춰 선 채로 반응하지 않는다. 긴장한 듯한 얼굴로 당신을 볼 뿐이다.)
Zabel:색이 빠져나가서 하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저 다른 색을 입히면 되는 거잖아?
: 자벨은 당신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모자를 벗기고, 목도리를 살짝 풀어줍니다.
자벨의 희끄무레한 금빛 눈동자 속에 비치는 당신의 머리칼, 그래요. 자벨의 머리카락 색깔로 물든, 제로, 당신의 머리카락입니다.
Zabel:내 색을 너에게 넘겨줄게. 거의 다 끝났어. 마지막으로 네 살갗과 내 살갗이 닿기만 하면 끝이야.
Zero:(곧바로 뒤로 물러선다.) ...지금, 네 생명을 내게 넘기겠다는 건가? 그런 계약은 한 적이 없을 텐데.
Zabel:(뒤로 물러서는 당신을 굳이 쫓아가지는 않았다.) 생명을 넘기는 게 아니야. 색깔만 좀 넘겨주겠다는 거지. 그리고 계약 내용에도 문제는 없어. 너와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끝을 받아들이는 순간까지 함께 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Zero:...... (입술을 콱 깨물다가 멈춘다.) 역에 있던 자처럼, 너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
Zabel:그렇게 되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마치 가볍게 몸을 놀려 적을 제압하고 난 이후의 표정과도 닮아있었다.) 나는 만족해. 그리고 난 네가 이 불합리한 끝을 그다지 만족해하지 않는 걸 알고 있어.
Zero:그래. 정확하다. ...별로 달갑지 않은 결말이군.
Zabel:그럼 완벽한 계약 수행 조건이 갖춰졌네. 너는 내 색을 받아 살아가고, 나는 내 모든 색을 너에게 넘겨주고.
Zero:네 동료들에겐 뭐라 설명해야 하지? 그들도 이 결말을 납득할 거라고 보장할 수 있나?
그리고 네 '엄마'에겐?
Zabel:(예상치 못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자 입술을 비죽였다.) 보스는 내가 뭘 하든 내 편인 사람이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면 말리지 않아. 동료들은... 글쎄. 네가 잘 말해줘. 나는 그 어느때보다 만족했다고.
Zero:...... (한숨을 내쉰다)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제 멋대로군. 너란 녀석은.
하지만... 싫진 않았다.
Zabel:내가 싫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럼 내 색을 받아줄 거 아니야.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나 대신 살아. 내가 대신 네 흰색을 가져갈게.
Zero:...... (조용히 손을 내민다.) 후회하지 않겠나?
Zabel:(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난 어차피 네가 싫다고 해도 억지로 할 생각이었어.
Zero:(허, 하고 혀를 찬다.) 당돌하군.
...그렇지만,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네가 내게 해준 말도, 해준 것들도, 보여준 풍경도. 전부.
Zabel:응.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에 억지로 하려면 힘을 좀 써야할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나야 좋은 건가.
난 그냥 네가 살아가길 원해.
내가 죽어도.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Zero:어째서 내게...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Zabel:(말이 완성되지 않고 입술이 뻐끔거렸다.) 그게 왜 중요해?
Zero:어떤 존재든, 최우선은 자기 목숨이다. ...그걸 내놓는다는 건, 그것도 타인을 위해서... 그건, 보통의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너는 내게 굴종한 것도 아니다. 내게 공포심을 느낀 것도 아니야.
Zabel:맞아. 난 죽기 싫어. 난 죽기 싫어서 살아남기 위한 모든 발버둥을 치며 지금까지 살아왔어.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번에는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아.
Zero:(입을 벙긋거린다.) ...나를 믿기 때문인가? 내 무엇을?
Zabel:몰라. 나는 너의 무엇을 믿는걸까? (어쩌면 이유를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 고민은 필요없어. 나는 내가 죽는 대신 너를 살리고자 이곳으로 온거니까.
Zero:...... (내민 손을 떨구지 않는다.) ...너처럼 할 자신은 없다. 너처럼 영웅이 될 수도 없어. ...다시 묻겠다. 그래도 상관 없나?
Zabel:난 네가 영웅이라서 살리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난 영웅이 아닌데, 라는 볼멘 소리를 덧붙인다.) 난 그저... 너라는 사람을 살리고 싶은거야. 난 네가 어떻게 살든 신경 안 써. 이제와서 말이 길어지는 거 보니, 혹시 주저하는거야?
Zero:마지막 질문일 뿐이다. 나중에 가서 다른 말 들으면 곤란할 테니까. ...결정에 변함이 없다면, 네 뜻대로 해라. 따르겠다.
Zabel:(작게 숨을 들이키고는 손을 뻗었다.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개의치 않으며 네 손을 잡았다. 서늘한 손이었다. 제 손도 차가운 편이었지만, 더욱 서늘한 손이었다. 그 손을 꼭 붙잡고 쓸어내리며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손이 차갑네. 걱정 되게.
Zero:네 손도... 차갑기는 마찬가지다. ...... (가만히 손을 내려다본다. 두 사람의 손 모두 새하얬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 마지막으로 닿은 그의 온기는, 이 추운 눈보라 속에서도, 따스했습니다.
Zabel:고마워.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소원을 들어주어서.
: 그녀는 서글프게, 하지만 어쩐지 행복해보이는 미소로 웃습니다. 맞닿은 피부 위로 자잘한 떨림이 전해져옵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차마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 스킨십은 영원과도 같은 찰나였습니다.
마지막 스킨십을 마친 이후, 그의 눈동자는 새하얗게 변해 있습니다.
Zabel:안녕. 네 일부분이 될 수 있어서 기뻤어. 그리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동안 몇번이고 회피하고, 부정했던 감정의 언어였다.) 그리고, 정말 많이 사랑했어.
: 그리고 그 마지막 미소와 함께, 자벨이 새하얗게 부서집니다.
마치 강풍에 눈으로 뭉쳐둔 눈사람이 부숴져 날아가는 것처럼, 새하얀 가루가 된 그녀가 눈보라와 함께 공중으로 흩어집니다.
그동안 고마웠다.
(눈발처럼 무서지는 자벨의 흔적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 아. 어쩜 이렇게도 서글프고 아름다운 풍경일까요.
그래요. 그가 바란 대로, 그는 당신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이 설산에서. 당신은 혼자가 되었습니다.
...아니요. 혼자가 아니겠지요.
새하얗게 부서져 바람에 날아간 그녀는, 그야말로 이 새하얀 세상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마치 당신에게 모든 색을 칠해주고 텅 비워진 새하얀 캔버스처럼 말이지요.
차가우지만 따뜻하게 세상을 덮는 새하얀 눈.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오히려 새하얀 하늘.
: 거칠게 뺨을 때리는 차가운 하얀 겨울바람.
그래요. 당신을 감싸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흰색이 그대였습니다. 자벨.
그러니, 당신은 산을 내려가서 내일을 살아가야죠. 분명, 이 세계를 벗어나면, 그녀가 당신에게 건네 준 오색빛깔의 미래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당신을 이루는 모든 것. 당신이 밟고 바라보는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 그 모든 빛깔이.
제로. 그대가 되었습니다.
Ending 2. 흰 빛 속에서 모든 색깔이 빛날지어니.